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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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발행된 <불교> 6호의 소식란에 중국 북경발 기사로 ‘조선불교유학생의 근황’이라는 기사가 있다. 6인의 유학생이 대학에 입학하였다는 기사인데, 김봉환은 문화대학(文化大學)에, 김성숙은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윤종묵은 평민대학(平民大學)에, 김규하 차응준 김정완 3인은 북경대학(北京大學)에 입학하였다. 김성숙과 김봉환은 우리가 앞서 김사국을 찾아가 볼 때 살펴본 스님들이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 즉 장지락이 김성숙의 가명인 김충창을 만난 시점이 이 때이다. 장지락은 자신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준 사람으로 김성숙을 꼽고 있다. 아리랑에서 김성숙은 1922년에 다른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북경으로 건너온 것으로 기술되었는데, 위의 기술된 6명이 장지락이 만난 6명의 스님일까?
장지락이 김성숙을 만난 해를 1922년이라 하는데, 이는 장지락의 착오이다. 김성숙은 1923년에 북경으로 건너갔다. 먼저, 아리랑에 기술된 스님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김성숙은 젊은 승려 5명과 정치활동을 해나갈 자유가 있는 북경으로 건너갔고, 이 6명은 문학단체를 만들고 『황야』라는 잡지를 냈다. 이 기간 동안에 김성숙을 포함한 3명의 젊은 승려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나머지 3명은 혁명이란 도무지 잠꼬대 같은 소리라며 금강산으로 되돌아 갔다. 장지락은 “김성숙과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살았으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모두 함께 나누었다”했으므로 이 서술은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장지락은 ‘아리랑’의 각 주에서 금강산 승려 중 공산당원이 된 사람을 4명 알고 있다고 설명을 하였다. 이 중 두 명은 1927년 광동코뮨에서 죽었다. 나머지 두명은 김성숙, 김봉환을 일컫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사정을 알기 위해 먼저 ‘재연경조선불교유학생회(在燕京朝鮮佛敎留學生會)’로 일컬어지는 북경불교유학생회(北京佛敎留學生會)로부터 시작해보자. 1923년 10월 28일 북경에서 창립된 불교유학생회는 상호친목과 학술을 강구하고 자유평등의 신사회를 건설함을 목적으로 하여, 체육부, 문예부, 경리부를 설치하였다.
북경유학생회의 활동 중 주목할 것은 1927년 2월부터 발행된 기관지 『황야(荒野)』이다. 장지락이 말한 바로 그 잡지이다. 내용은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 일반에 걸친 것이었다. 매호 40~ 50쪽으로 구성된 황야는 당시 북경 한인사회에서 발행한 출판물 가운데 가장 짜임새를 갖춘 잡지였다. 학술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국내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주요 집필자는 앞서의 9명 외에 김천(金泉)이 추가된다. 황야는 격월간으로 북경세계어전문학교 내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으며, 출판 경비는 대부분 회원의 회비로 충당되었다. 북경불교유학생회에 속한 것으로 기록이 남는 사람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자. 일단 김성숙과 김봉환은 제외한다. 김성숙은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귀국하였고, 김봉환은 1927년 만주로 넘어가 1930년대에 김좌진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사망하였다. 대략 알려진 사실이 많으며, 우리가 차후에 살펴볼 기회도 있을 것이다. 나머지 6~7명에 대해서 추측 해본다. 장지락은 ‘혁명은 잠꼬대 같은 소리’라며 3인이 귀국하였다고 하는데 상세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손염홍은 이들 3인을 한봉신 김봉수 윤금으로 보고 있다. 경남 표충사 스님인 윤금은 1924년 여름에, 김봉수는 1924년 가을에, 한봉신은 1925년 1월에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3인은 귀국 이외에는 중국에서 그들의 그 구체적인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손염홍이 이야기한 근거는 이들 3인이 귀국하였고, 귀국한 년도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윤금, 김봉수, 한봉신 3인이 혁명이 잠꼬대 같은 소리라며 귀국한 장지락이 말한 그 3인일까? 과연 그럴까?
손염홍이 밝힌 9명의 스님 중 먼저 1924년 발간된 <불교> 6호에 실린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자. 장건상, 김성숙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가을에 창립된 혁명사(革命社)에 김봉환, 장지락의 이름과 더불어 차응준 윤종묵이 나타난다. 혁명사는 혁명동지회, 창일당 등으로 이름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학자들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로 파악하고 있다.
1925년 1월 창립된 고려유학생회에 윤종묵이 김규하와 더불어, 1925년 정기총회에는 차응준이 나타난다. 1926년 11월 창립된 북경한국유학생회에 차응준은 김봉환과 더불어 임원으로 나타난다. 즉, 차응준은 1926년 11월까지 북경에 있었던 것이 증명된다. 윤종묵은 1925년 1월까지 있었던 것이 증명되고, 사회주의 운동을 한 것까지 확인된다. 즉, 윤종묵과 차응준은 중국에 남아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머지 두 명이 김규하와 김정완이다. 김성숙이 결합한 ‘혁명사’에 앞서 북경조선유학생회들이 결합한 반역사(反逆社)가 1924년 봄에 설립하는데, 이곳에 김규하와 김정완의 이름이 나온다. “현재의 사회제도에 반역한다”는 의미에서 세운 반역사에 김성숙, 김봉환, 차응준 외에 김규하 김정완 유우근이 함께한다. 앞서 살피었듯이 김규하는 1925년 1월 창립된 고려유학생회에도 이름이 나타난다.
다음은 손염홍이 언급한 3인의 승려 윤금, 김봉수, 한봉신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 중 김봉수, 한봉신은 중국 유학 전에 김규하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경 유학전에 김봉수, 한봉신, 김규하는 국내에서 경성에 유학하였던 지방 승려로 구성된 재경불교유학생학우회(在京佛敎留學生學友會) 회원이었다. 이 단체는 이전에 유심학우회(唯心學友會)라는 이름으로 1921년 10 16일 각황사에서 임시총회를 가진 바, 김봉수는 지육부(智育部) 부원으로 나 타난다. 유심학우회는 1922년 3월 5일 정기총회를 갖고 이름을 ‘재경불교유학생학우회’로 이름으로 바꾸고 임원을 선출한 바, 김규하가 총무부원으로 한봉신이 재무부원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김규하, 김봉수, 한봉신은 중국 유학전에 재경불교유학생학우회에서 인연이 먼저 맺어진다. 1923년 10월에 창립된 북경불교유학생회 구성원 9명 중 8명의 인연을 마무리 정리하자. 아리랑에서 장지락이 알고 있는 『황야』를 발간하였다고 거론된 6인의 스님은 <불교> 6호에 거론된 김성숙 김봉환 윤종묵 차응준 김규하 김정완일 6인일 가능성이 높다. 장지락은 김성숙 김봉환 윤종묵 차응준과 혁명사 활동을 함께 하였고, 김규하와는 1925년 '북경사회과학연구회' 활동을 하였다. 김정완은 유학 초기에 해당되는 1924년에 반역사 활동에서만 함께 하였다. 그리고 김봉수, 한봉신은 앞서 6인 중 김규하와 인연이 맺어진다. 오직, 윤금만이 그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 장지락은 김성숙을 포함하여 3명의 젊은 승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나머지 3명은 금강산으로 귀국하였다고 언급한다. 즉, 장지락이 황야를 통해 알고 있는 스님은 6명인데, 공산주의자가 된 4명과 되돌아간 스님 3명은 7명이다. 6명, 그리고 7명이라는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자가 된 4명은 누구고, 혁명이 잠꼬대 같다고 되돌아간 3인은 누구일까? 공산주의자가 된 4명의 스님은 당을 표방한 혁명사를 함께한 김성숙 김봉환 윤종묵 차응준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이렇게 정리하면 김규하가 문제가 된다. 김규하는 김봉수 한봉신과 함께 중국 유학전부터 인연이 있던 사이고,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여하여 장지락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귀국한 3인은 누구일까? 손염홍의 지적과 같이 윤금, 김봉수, 한봉신일까? 혹 중국 유학전에 인연이 있었던 김규하, 김봉수, 한봉신은 아닐까? 앞뒤를 맞추어 보면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는 이렇다. 6인의 승려가 1923년 유학하여 잡지 황야를 발간하였고 이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을 매개로 장지락을 알게 된다. 장지락은 이 들 중 4인의 공산주의 승려를 이야기하는 데 김성숙, 김봉환, 차응준, 윤종묵이 이들이다. 이들 중 2인, 즉 차응준과 윤종묵은 1927년 광동 코뮨에서 전투 중에 죽는다. 그리고 혁명이 잠꼬대 같다고 돌아간 스님 3명은 김규하, 김봉수, 한봉신이다. 이들 셋 중 김규하는 사회주의 운동에도 동참한 바 있지만 서울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김봉수, 한봉신과 함께 귀국한다. 과연 그럴까? 아직까지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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