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tory

조계사에 모셔진 세존의 사리탑

북한산인 2012. 5. 4. 15:46



부처님 진신사리는 어떻게 조계사로 왔을까?

  *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05월 04일 (금) 09:56:33김남수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계사 대웅전 앞에 서 있던 탑은 지금 모셔져 있는 탑과는 다른 7층 석탑이었다. 지금은 찾아주는 이 없는 한국불교역사기념관 조그마한 뒤뜰에 처량히 서있지만, 그래도 세존의 사리를 80여 년 간 보듬어 안고 있던 성보였다. 이제는 그 임무를 다하고 뒤뜰에 자리 잡은 탑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르마 팔라의 불골(佛骨) 기증


1913년 8월 스리랑카의 불자 다르마 팔라(1864-1933)가 서울에 도착했다. 관련 기사 하나를 먼저 보자.


別項과 如히 印度僧 달마파라사(達摩婆羅師)가 卄一日 朝鮮 僧侶의 代表者에게 向하야 佛骨을 贈進함을 수답(酬答)하기 爲하야 三十本山의 住持 代表者 一同은 金製 茶器 一對를 美術品 製作場에셔 製作하야 同師에게 贈呈하얏더라.  - 매일신보 1913. 08. 23


 전후 사정을 정리하면, 다르마 팔라는 미국으로 갔다가 귀국 길에 8월 21일 우리나라를 들렸다. 21일에는 31본산 주지 등이 준비한 환영회에서 1시간여에 걸친 강연을 하였고, 22일에는 불교신도들로 구성된 귀부인 모임에서 강연을 한 후, 23일 봉천으로 떠났다.


  
▲ <사진1> 다르마 팔라
조선을 방문한 다르마 팔라는 조선불교도들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었는데 세존의 불골(佛骨), 즉 석존의 진신 사리였다. 후대의 기사를 살피면 사리는 조선과 일본이 불교 국가라는 사실에 감명받아 사리를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답례로 30본산 주지 대표자 일동은 금으로 만든 다구 1세트를 다르마 팔라에게 증정한 것이다.


 사리를 기증받은 조선불교계는 10월에 봉안식을 준비하고, 이전에 일반인들에게 3일간 사리 참배(拜觀)를 계획하였다. 봉안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총독의 참관(?觀)을 거친 후 하기로 하여 예정보다 다소 시일을 늦추어 진행하게 되었다.


사리 배관식은 1913년 12월 29일 오후 1시에 진행되었다. 이 때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이 흥미롭다. 불교계 30본산 주지를 비롯하여, 이완용, 권중현, 박기양, 장석주 등 후세에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규정된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 등 내빈이 수백 명이었고, 귀족들의 부인 십여 명을 비롯한 백여 명의 부인, 본원사 승려등 일본인 승려 수십 명도 참석하였다. 배관식은 불교 의식을 마친 후 참석한 내빈들이 꽃과 다과를 받아들고 참배하며, 최종적으로 사리를 은갑에 넣어 안치하면서 끝났는데 이때가 세시 반이었다.


 1929년, 사리는 꽤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데, 그해 가을에 있었던 조선박람회와 연관된다. 각황사에 모셔졌던 사리는 조선박람회 기간 동안 1929년 10월 1일부터 20일까지 각황사에서 일반인들의 참배의식을 갖기도 하였다.


각황사에 모셔진 사리는 7층 석탑이 조성되어 자리를 잡으니 이때가 1930년 10월 14일이다. 7층 석탑은 원주(院主) 이윤근씨를 비롯한 여러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조성되었다. 이후 어느 때인가 현재의 조계사 터로 이운된 것으로 보인다.



  
▲ <사진2> 7층 석탑 낙성식 장면, 동아일보 1930년 9월 15일

호법(護法) 행자, 다르마 팔라


 조선불교계에 진신사리를 기증한 스리랑카 다르마 팔라(1864 ~ 1931)를 한자로 의역하면 호법(護法)이다. 다르마 팔라는 그 이름처럼 근대에 들어 스리랑카 불교를 부흥시킨 사람 중 한명이다. (이 단락에서 다르마 팔라에 대해서는 <참고자료>에 있는 송위지의 글을 인용하였다.)

 다르마 팔라는 외세의 지배로 침체에 빠져 있던 스리랑카의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다방면으로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노력한 현대인 중의 한 사람이다. 나이 20이 되어 재가 독신 생활을 결심하고는 그때부터 국가와 불교를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방을 청소하고, 자신의 침대를 손수 만들었으며, 사무에도 참여하여 문서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우편으로 부치는 일조차 손수 했다.


 다라마 팔라는 1891년 초 불교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부다가야의 폐허를 보고는 세계 각국의 불교도들에게 ‘어찌 우리가 불타 세존께서 도를 이루신 이곳 부다가야를 이렇게 황폐한 상태로 방치할 수 있는가?’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그 후 부다가야의 부지를 불하받아 대각회에서 사용하려 했으나 힌두교도를 앞세운 인도 정부의 비협조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다르마팔라는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 생에는 힌두교도 브라만의 가정에 태어나 불교도가 부다가야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서원할 만큼 이곳에 애정이 많았다.


  
▲ <사진3> 가부좌를 한 다르마 팔라
 1898년에 그는 스리랑카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다시 나라 전체를 순회하며 종교적, 문화적 자부심을 호소했다. 그 후 북인도와 남인도를 차례로 방문해 불교를 중심으로 한 평화와 문화의 재창달을 호소하면서 특히 남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와 불가촉천민들에 대우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1913년 하와이를 방문했던 다르마 팔라는 귀국길에 한국을 들렀다. 이 때 사리를 기증한다.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에 대각회의 지부를 결성하여 수시로 드나들면서 포교에 힘쓰던 그는 1931년 7월 13일 드디어 아나가리까(Angarika, 재가 독신 생활)를 청산하고 승단에 입문하게 된다. 1933년 1월 16일에는 많은 승려들의 축하를 받으며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1933년 4월 28일,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뿐 아니라 불교의 세계화에 정열을 바쳤던 다르마팔라는 임종을 맞이한다.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


1913년 다르마 팔라의 사리 기증과 봉안식 과정에서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읽는다. 하나는 사리를 일반인들이 참배하는 과정이 총독이 참배를 먼저 하는 바람에 늦춰졌다는 것이다. 통감부 시절인 1905년부터 시작하더라도 이는 불교계에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일제 식민지시기로 들어오면서 사대문 안에 사찰이 세워지고, 조선의 승려들이 총독과 회의도 하는 등 불교계는 이전의 조선시대와는 다른 대접을 받게 된다.


  
▲ <사진4>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조계사 사리탑. 조계사 대웅전 앞에 대형 석탑이 세워지면서 현재는 조계사 뒷편 공원으로 옮겨 서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대략 짐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불교계 변화를 대략 알고 있기도 하다. 근대불교의 정체성은 이로부터 논란이 된다. 하지만, 대략적인 짐작만으로는 이 시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좀 더 고민이 필요한 사안일 것이다.


 두 번째의 상징적 의미는 조선 불교계가 세계의 불교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국, 일본과 구별되는 세계의 불교를 스리랑카를 통해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1918년에는 몽고의 승려들이 조선을 방문하고, 이들 역시 다르마 팔라가 환영받은 것 이상으로 환영을 받으면서 일본으로 향한다. 1900년대를 전후한 이십여 년 기간에 기독교라는 이질적 종교, 또한 일본불교라는 또 다른 불교를 만난 조선불교는 1910년대 동아시아 지역을 넘어선 또 다른 불교를 다시 만나기 시작한다.


<참고자료>
선우도량 근현대불교사연구회,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근현대사Ⅱ, 선우도량 출판부
송위지, 「스리랑카: 구나난다, 올코트, 다르마팔라, 아리야라트네」,『불교평론』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