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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환과 김좌진 장군 암살의 미스테리

북한산인 2012. 6. 1. 12:05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06월 01일 (금) 11:03:46김남수


 북경으로 유학한 6명의 스님 중 마지막 남은 사람이 김봉환이다. 앞서 김사국과 북경으로 유학한 승려들을 살펴보면서 간간히 김봉환에 대한 일들이 거론되었다. 불가피하게 반복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김봉환은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 혹은 사회주의 운동가의 이름보다는 김좌진 장군 암살을 교사한 사람으로 세간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좌진은 1931년 1월 24일 만주에서 박상실에 의해 살해된다. 암살 직후 교사자로 지목된 김봉환은 검거되어 살해된다. 김봉환 등의 김좌진 암살은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김좌진을 암살한 박상실이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둘째는 박상실을 교사한 김봉환은 왜 김좌진을 암살하려 했을까라는 문제이다. 일각에서는 김봉환이 일제에 회유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있으며, 또 다른 시각에서는 당시 그 지역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간의 알력 다툼에 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 번째는 김봉환과 내연의 관계였던 여류문인 강경애의 실존 문제이다. 김봉환의 내연녀가 강경애인가 김경애인가, 그리고 강경애라면 여류문인으로 유명한 강경애와 동일 인물인가 등의 문제이다.


 우리는 김봉환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이 같은 논란에 대해서도 들여다 볼 예정이다. 김봉환에 대한 기록이, 앞서 글을 연재하면서 많이 의존하였던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정화암과 이강훈의 증언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김봉환에 대한 양자의 시각은 전혀 다른 면모를 갖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살펴볼 예정이다.


범어사 명정학교 졸업한 김봉환

 김봉환은 기록에 김봉한(金鳳漢)으로도 표기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인물란에 따르면 김봉환(자료에는 김봉한으로 표기되어 나옴)은 1902년 5월 28일 양산군 동면 금산리에서 김기진(金基鎭)에게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서당에서 학문을 닦았다. 1912년 범어사에서 세운 사립명정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범어사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얼굴이 긴 편이고 하얀 피부에 중간 정도의 체격으로 표기되었고 성격은 온순한 편이라고 적혀있다.


  
▲ [사진1] 범어사에 설립된 명정학교 전경

 1902년생이라 했으니 김봉환이 1912년 졸업하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김봉환이 10살에 명정학교를 졸업한 것이 된다. 의문이 들 수 있는 기록이다. 자료의 착오도 있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명정학교 2회 졸업은 1913년에 있었다. 명정학교 2회 졸업생은 김봉환 이외에 강덕우, 김도원, 김상헌, 김정우, 차상명, 김봉휘가 있다.

 역사적 사건에 나오는 김봉환은 3.1운동부터이다. 3.1운동에 동참한 불교계 대표인사는 한용운과 백용성이다. 한용운은 3.1운동 직후부터 중앙학림 학생들과 논의하였던 것으로 알려지며, 김법린과 김상호도 그 중심에 선다. 김법린과 김상호는 범어사 출신 스님이었고 이들은 서울에서 3.1운동 후 범어사로 내려와 운동을 준비한다. 3월 18일, 19일 범어사 명정학교 재학생들과 지방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김봉환도 참여한다. 김봉환은 만세운동 참여로 1년의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정확히 자료를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김봉환은 1919년 4월 2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0년 1월 29일에 출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출옥 후 김봉환은 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전개한다. 1920년 6월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 9월 10일 범어사 지회를 설립하였는데 김봉환은 차상명, 김해관, 지설준과 더불어 포교부원으로 활동한다. 김봉환은 늦어도 1921년경에는 서울로 상경하였으며 안국동 선학원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다. 1921년 12월 창립된 불교유신회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2월 불교유신회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유신회원들이 각 지방으로 파견되었는데 김봉환은 경의선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 [사진2] 조선불교청년회의 제1회 정기총회 모습

 우리가 김사국을 논할 때 잠시 살펴보았는데, 김봉환은 이즈음 사회주의 운동에 결합하게 된다. 1922년 1월 창립된 무산자동지회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즈음 운암 김성숙을 알게 된 듯하다. 김봉환은 김성숙과 조선불교유신회 활동을 함께 하였으며, 무산자동맹회 활동도 함께 하였다.


북경 유학길에 오르다


 김봉환에 대해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 김봉환이 1922년 공산주의자 김한(金翰)의 부하가 되어 무산자동맹회에 들어가고, 청년 승려 중 불량분자를 공산주의자로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1922년 7월 제다(齊多, 현재의 러시아 치타)에서 공산당대회가 개최되는 것에 맞춰 무산자동맹회 대표자로서 출석하고자 출발했으나,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 [사진3] 김봉환과 함께 무산자동맹회 활동을 함께한 독립운동가 김한

 1922년 7월에 열린 공산당 대회라 하면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머나먼 시베리아의 한 지방 도시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애초에 치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장소를 옮기어 열린 대회이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기록이 또 있는데 정화암의 증언이다. 정화암은 김봉환의 인간됨을 평가하면서 김봉환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에 참여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김봉환은) 조선공산당의 대표로 참가했는데 일본 공산당의 대표인 시미즈라는 사람과 같이 같습니다. 모스크바에 가니깐 소련인들이 시미즈를 가리키며 <일본에서 온 저 놈은 스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뿐 아니라 함께 온 김봉환마저 의심하더랍니다. 그래서 김봉환은 <그렇다면 내가 처치를 하겠다>고 다짐한 뒤 시미즈를 산으로 유인해 총으로 쏴 죽여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했다는 겁니다. 이런 강심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됨은 대단한 일꾼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라 하면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4차대회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기록을 믿는 다면 김봉환은 1922년 가을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참여한 후,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4차 대회에 참여하고 이후 북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양 대회 참가자 명단에서 김봉환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김봉환이 그 곳에 간 것은 분명할까? 혹은 대회에 참여한 다른 사람과 함께 수행차원에서 갔을까? 정화암은 김봉환의 기억을 통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김봉환이 1922년 가을에 국내를 떠나 시베리아 쪽으로 갔다는 두 가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봉환이 김성숙 등 5명의 스님들과 함께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는지, 혹은 코민테른 4차 대회에 참여한 후 북경으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봉환은 1923년 김성숙 등 5명의 스님과 함께 북경에 있었다. 김봉환은 문화대학(文化大學)에 입학하였으며 이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북경에서 김봉환은 1923년 10월 28일 창립된 ‘재연경조선불교유학생회(在燕京朝鮮佛敎留學生會)’ 활동을 하였으며, 북경조선유학생회들이 결합하여 1924년 설립된 반역사(反逆社)에 참여한다. “현재의 사회제도에 반역한다”는 의미에서 세운 반역사에 김성숙, 차응준, 김규하 등 다른 승려들과 함께 한다. 1924년 가을에 창립된 혁명사(革命社) 활동을 전개하였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 [사진4] 아나키스트 정화암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로 유명한 정화암을 만난다. 1923년 김봉환이 북경에 도착할 즈음 한인사회에 아나키스트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조류가 있었는데 정화암은 아나키스트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화암과 김봉환은 인간적으로 가까웠고 함께 많은 일도 한 사이이다. 김봉환은 유물사관에 관한 책을 탐독하면서 공산주의에 기울었고 유학생들이 주목하였던 사람이고, 정화암과는 사상적인 논쟁도 많이 하였다. 정화암은 아나키즘이 옳다고 하고 김봉환은 공산주의가 옳다고 각기 주장하였다. 김봉환은 공산당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열단 일도 보고 임정일도 거드는 등 활동적이고 능률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김봉환과 함께 활동하였던 김성숙, 장지락 그리고 2명의 승려는 1925년 겨울 광저우로 향한다. 김봉환은 이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화암의 회고가 유일한데 김봉환은 1927년 만주 영안현(寧安縣)으로 떠난다. 영안현의 어느 마을에서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으로 고국에서 부임해 온 여교사와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봉환은 그 곳에서 운명적인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참고자료>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이성수, 명정학교 설립시기ㆍ위치 확인, <불교신문> 2442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금정중학교 100년 화보집 http://kumjung.m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