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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연해주에서의 계몽운동 - 우봉운 두번째

북한산인 2012. 6. 29. 17:16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06월 29일 (금) 15:24:53김남수


 1910년대 우봉운의 활동은 북간도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이동휘와 동선이 겹쳐진다. 이 시기는 우봉운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191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던 때이고, 우봉운의 활동이 이동휘라는 큰 나무의 그늘 아래서 의미를 지니는 때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이동휘와 관련된 내용은 두가지 책을 인용하였다. 반병률이 지은 『성재 이동휘 일대기』와 서정민이 지은 『이동휘와 기독교』라는 책이다. 그리고 반병률의 논문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항일여성운동, 1909~1920」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우봉운의 활동을 인용하였다. 논문의 한 단락에서 우봉운과 기태진에 대한 이력을 적고 있는데, 우봉운과 관련된 글로는 유일한 듯하다. 『성재 이동휘 일대기』는 제목 그대로 이동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고 『이동휘와 기독교』라는 책은 이동휘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입문하여 활동하였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성재 이동휘(1873 ~1935)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을사늑약 이전의 시기에는 무관으로 관료활동을 하였으며, 독립협회·상동청년회 등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동청년회는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어야 했다. 이동휘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관료의 길을 접고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이동휘는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의 방법으로 계몽에 역점을 두는 한편, 여러 계몽단체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활동은 기독교와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1908년 봄에 캐나다 선교사인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목사를 만났고, 그리어슨 목사는 이동휘의 신변을 보호해주는 한편 이동휘의 계몽활동을 지원해주었다. 이동휘는 원산, 성진 등을 순회하면서,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등을 호소하였으며, 함경도 내에만 50여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동휘는 성진에 협신중학교(協信中學校)를 설립하였고, 교사로 동경물리학교에서 공부한 오영선과 기태진, 홍우만등이 초빙하니 협신중학교 교사진은 곧 함경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협신중학교가 설립된 성진은 이동휘의 고향 단천 바로 위에 있는 지역이다.


 아마도 이때 우봉운의 남편 기태진과 이동휘의 인연이 시작된 듯하다. 협신중학교 교사로 있던 기태진은 서울과 대구에서 활동하던 우봉운과 러브레터를 교환하면서 연인의 정을 쌓아갔고, 그리고 결혼에 이르게 된 시기이다. 이들이 결혼하였다면 우봉운은 대구에서 함경도 성진으로 거처를 옮기었을 것이고 이동휘와 인연을 쌓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동휘는 이 시기에 함경도 뿐만 아니라 간도와 연해주에 이를 정도로 기독교 전도와 계몽운동에 전력하였다. 1910년 말 안명근 사건이 일어났고, 이동휘는 1911년 3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기태진이 해외로 도피하였다고 회고한 사건이다. 
 

명동여학교에서의 교사 생활


 기태진과 우봉운이 함경도 성진을 떠나 정착한 곳이 북간도의 명동촌이었다. 우봉운은 명동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명동학교(明東學校)는 1908년 김약연(金躍淵) 주도로 화룡현 명동촌에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명동학교는 후에 윤동주, 문익환 등이 다닌 곳으로 유명하다. 


 우봉운은 간도로 거처를 옮긴 후 국자가 중국학교(局子街 中國學校)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명동여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명동여학교는 1911년 설립되었는데 교사로 우봉운, 이의순, 정신태가 있었으며, 학생은 보통과 53명 고등과 12명이었다. 이들 세 명은 1913년 삼국부인전도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연합과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 1910년대 명동교회의 모습
우봉운이 이 시기를 회고한 글이 있다. 조금 길지만 우봉운의 글솜씨도 익힐 겸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지금부터 20여년 전 내 나히 스물셋되든 해 외로운 처녀는 큰 뜻을 품고 荒漠한 북만주의 너른 벌을 헤매엇다. 그때 생각에는 북만주를 무대로 일하여 보려 함이다. 처음 李東輝씨 따님과 함 局子街 中國學校에 입학하여 거기서 중국말과 글을 배운 뒤 그 이듬해에 예정과 가치 海蘭江부근에서 잇는 明東村에다가 明東學校를 설립하고 거기에서 젊은 여교사 되어 아츰 나절 학동에게 글을 가르첫다.
 그때는 가슴에 타는 오직 奉公의 일념이 끌튼 때라, 학교라 하여도 모일 큰집이 어대 잇섯스랴. 마을 뜻잇는 남자들을 동원시켜 뒷산에 올나 소나무를 찍어 오래서 기둥을 세우고 나는 아히들을 다리고 압강번 진흙을 함지박에 파서 이고는 도라 와 벽을 부첫고 또 도라 다니며 석가래 참나무를 주어서 치맛자락에 싸안고 도라 와 집짓는 도음에 쓰게 하엿스며 또 학교의 經費를 만들기 위하여 그압 밧흘 가러, 거기에 감자도 심으고, 밀도 보리도 심어 농사도 지엇다. 주경야독이란 그때의 나의 생활이리라. 등잔불 밋헤 모아 드는 청년을 나는 밤에는 가르키고, 낫제는 다리고 나가 농사 지엇든 것이다.
 스무 나무살 나는 젊은 여성에게 과한 노동이라고 할가.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모다 깃부엇다. 힘드는 줄 몰낫다. 그리든 시절은 아아, 가고 말엇는가. 나와 가치 海蔘威 삼일 女學校와 間島의 明東學校에서 함께 일보든 李東輝씨 따님, 그 동무도 이제는 上海에 잇다더라.
 안타가움 봄, 서급흔 젊문 덧업는 인생. 몃 천년 전부터 이 인류가 늣겨 오는 몃 만년 뒤까지 數十萬靑春士女를 탄식케 하려는 봄이 저 들 창박으로 또 보이는구나.

                  - <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 《삼천리》제7권 3호, 1935년 3월

 

 글에서 밝힌 ‘이동휘 따님’은 이의순을 일컫는다. 이의순은 이동휘의 둘째딸이며 우봉운과 함께 정신여학교를 다녔고 후에 명동여학교에서 같이 교사생활을 한 사람이다. 아마도 이의순이 기태진과 우봉운의 부부관계를 이어주게 하지 않았을까? 


 우봉운과 기태진은 이동휘가 명동촌으로 되돌아 온 1914년까지 그 곳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반발하자 우봉운은 명동촌에 있기 어렵게 된다. 이 시기 우봉운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이동휘의 행적을 따라 갔을 것이다. 이동휘 일가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일본 관헌들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왕청현으로 이주하였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앞서 우봉운의 글에서 이의순과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한 해삼위(海蔘威) 삼일여학교, 이 곳에서 거론된 해삼위는 블라디보스톡을 일컫는 지명이다.


남편의 출가


 남편 기태진이 금강산으로 출가한 때가 이 즈음일 것으로 보인다. 남편 기태진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을 『한인신보』에 「염세주의인가」(1918.1.13)라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제목은 “남편은 금강산에 중노릇을 하고 부인은 간도 명동여교사로 있다”이라고 부쳤다.

 반병률의 논문을 통해 재인용하면, 어느 때인가 우봉운이 승려가 된 남편을 찾아 금강산에 갔다. 금강산에 가서 남편을 만난 우봉운은 “여보 당신은 당신 생각대로 중노릇을 하지만 나는 당길로 당신을 딸아 여승노릇은 못하겟고 오직 저 아들 웅(雄 )이를 데리고 북간도에 나가서 교육을 시키며 하나님 앞에 일을 하다가 당신이 회개하는 날이면 다시 만날런지요”하고 돌아왔다고 한다.『한인신보』기자는 우봉운의 이러한 결단을 “나의 늑김은 오직 우봉은씨의 장쾌한 결심을 찬양할 뿐이로라”고 칭찬하고 있다.


 남편의 출가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 넘쳐나는 글이다. 이 시각이 우봉운의 것인지, 이 글을 쓴 기자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기사에 짧게나마 우봉운과 남편 기태진의 경력을 적고 있다. 우봉운은 1889년 경남 김해출신으로 한성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의 남편 기태진은 황해도 해주사람으로 1882년 출생이며 경신중학교 출신으로 기록된다. 또 이들 부부는 국내의 기독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1914,5년경 성진에서 북간도로 나왔다고 기록된다.

 지금까지 진행해온 글과 다른 부분이 있다. 부부가 성진에서 북간도로 넘어온 시기를 1914,5년 경으로 보는데, 아마도 1911년 경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기태진과 우봉운의 큰아들 기웅(奇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봉운의 이동 경로, 용정에서 왕청을 지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기었다
 출가한 남편의 법명은 우리가 기명하였듯이 기석호이다. 특이한 것은 남편 기태진이 1920년 여름 간도에서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논문에 드러난다.    1920년이면 이미 출가한 승려의 신분이었고, 아마도 금강산이나 서울에 있었을 때로 볼 수 있는데 어떻게 간도에서 체포되었을까? 아직까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남편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지만 우봉운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다. 그리고 지금껏 그래왔듯이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우봉운이 있던 연해주는 한국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봉운은 혁명 이후 어느 즈음인가 기독교를 통한 계몽운동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환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참고자료>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서정면,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출판부
반병률,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항일여성운동, 1909~1920, 역사문화연구 제23집
《삼천리》제7권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