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과 활동 - 우봉운 네번째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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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운은 이르면 1921년 여름, 늦어도 1922년 초에는 경성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여자불교청년회가 1922년 4월에 창립되고 우봉운이 회장을 맡았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우봉운이 경성을 떠난 것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이전할 때이다. 거의 14~5년 만에 되돌아 온 경성에 우봉운이 의지할 만한 곳과 사람이 있었을까? 한 때는 남편이었지만 지금은 출가 승려가 된 기태진, 정확히는 기석호 스님이 그 곳에 있었다. 우봉운이 경성에서 생활하고 불교여성운동을 전개하는데 기석호의 지원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될 듯하다. 그들이 다시 부부생활을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봉운이 많이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봉운이 조선불교여자청년회를 구성하면서 진행한 불교여성운동의 주요 터전이 당시 종로 간동에 있었던 석왕사의 경성 포교소이다. 남편 기태진이 출가하였던 금강산의 사찰이 석왕사였을 것이다. 우봉운이 경성에서 기석호를 만날 때 기석호는 불교계 청년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꽤 뛰어난 강연을 하는 연사로 손꼽히고 있었다. 1922년 4월 8일 각황사에서 ‘불교유학생 학우회’에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데 기석호는 ‘살라는 우리인가 죽으라는 우리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데, 이 때 우봉운의 둘째 아들 기의벽(奇義闢)이 독창을 하였다. 우봉운은 그의 아들과 함께 부부관계는 아닐지라도 기석호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 우봉운이 불교 역사에 등장하는 첫 페이지가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창립이다. (이하 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 관련된 내용은 참고자료에 있는 김광식의 글에서 인용된 것이 많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1922년 4월, 불타의 정신으로써 여성의 덕성을 함양시키는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회장이었던 우봉운은 지대한 열성으로 조직의 창립, 유지 등에 힘써 1925년 봄에는 회원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창립 당시의 전체적인 조직의 개요와 부서조직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봉운이 경성으로 들어온 시기를 아무리 빨라도 1921년 후반기로 볼 수 있는데, 우봉운은 1922년 봄에 창립된 여자불교청년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 시기의 특성을 이해하더라도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 추이를 먼저 살펴보자. 1910년대 여성 불자가 계몽의 대상이었다면 1920년대는 계몽의 주체로 여성 불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 출발을 불교여자청년회로 잡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1년 4월 21일 불교부인회는 각황사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조선에 청년회를 설립하여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세상에 사람으로 생긴 이상에야 무엇이라도 일을 하여야 되겠으니 우리 조선 여자도 오늘부터는 서로 받들어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친절히 가르쳐 다같이 공평하게 사회다운 사회를 만들어 사람다운 생활을 하여야 되겠다고 열성적으로 말하”면서 불교여자청년회 설치를 결의하였다. 당시 회장은 서대혜였으며 서기장은 이숙이었다. 1921년 7월에는 정동에 있는 불교중앙포교소에 ‘경성여자문화학원’이 설립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정도의 여성들에게 예술, 철학, 어학을 교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두 단체의 성격과 인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지만 우봉운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창립 당시 여자불교청년회의 구성원을 알 수는 없지만 추론할만한 근거는 있는 데, 1923년에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대회에 불교청년회에서는 기석호, 이종천, 김운악이, 불교여자청년회에서는 김광호(金光浩), 이명규(李明珪)이 우봉운과 함께 참여하였다. 특히 불교청년회의 이종천과 불교여자청년회의 우봉운은 한진교, 이영, 강인택, 신명균, 민중식, 강우, 강영순등과 1923년 2월부터 전조선청년당대회 준비에 착수하였던 멤버이기도 하다. 이명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김광호에 대해서는 『불교』88호에 나와 있다. 김광호는 경성에서 태어나 어의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고에서 수학하였다. 수학중 결혼하여 졸업은 하지 못하였다. 3.1운동 후 야학 유치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범어사에서 불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불교여자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불교청년여성동맹 간부를 지냈다.
능인여자학원 교장으로 불교여자청년회가 창립 이후 가장 주력한 사업은 여성 교육 사업이었고 능인여자학원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능인여자학원은 ‘빈민여자’들을 위하여 1922년 10월 9일에 개학한 능인여자강습회로부터 출발한다. 교장은 불교여자청년회 회장이었던 우봉운이 담당하였으며, 교육부의 간부 5~7명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종로 사간동에 있는 석왕사 소유의 건물에 있었다. 1925년 동아일보에 「가뎡부녀의 배홀 곳」이라는 연재물에 두 번째로 능인여자학원이 소개되고 있다. 기사에는 능인여자학원이 1921년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1922년이 타당한 듯 싶다. 처음 창립은 불교녀자청년회의 우봉운 녀사와 그 외에 몃몃부인으로 발긔된 것인데 무엇보다도 구 가뎡부인의 교육긔관이 적음을 통한히 생각하고 발긔한 것입니다. 설립 당시에는 야학으로하야 석왕사의 집인 현재학원을 어더가지고 나희가 만하 학교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처녀와 구 가뎡부인 삼십여명을 모하놋코 선생 다섯분이 합력하여 의무로 교수하였는데 시초에는 일학년 밧게 업섯스나 해가 밧고이는데 따라 학년도 늘고 학생도 늘어 - 동아일보 1925년 3월 23일
능인여자학원의 운영체제의 변화는 경영적인 어려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자구노력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능인여자학원은 동아일보에 기사가 나갈 즈음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해 가을 1925년 10월에 경영권이 일본사찰인 서본원사(西本願寺)의 경성별원으로 이전하게 된다. 능인여자학원의 경영권 변화는 곧 불교여자청년회의 침체를 웅변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김광식은 이러한 변화를 교단의 변화와 연관시킨다. 불교청년운동이 역할을 하였던 총무원이 교무원과 통합되면서 해체되고 중앙의 불교청년운동은 그림자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고 한다. 불교청년운동의 변화는 곧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운신에도 제약을 가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봉운은 능인여자학원이 경영권을 이전 한 이후에도 교사 생활을 일정기간 진행하다가 1926년 5월 자신이 설립하교 교장까지 겸임한 능인여자학원을 떠나게 된다. 그 전후 사정을 기록한 기사가 1926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려있다. 서본원사 별원은 능인여자학원을 인수하면서 그 이전에 또 다른 곳에서 인수하였던 계산보통학교(桂山普通學校)와 통합을 시도한다. 서본원사 별원은 학교를 통합하면서 학생들을 계산보통학교에 전학시킨다. 동년 4월 능인여자학원의 교사로 재직중이던 우봉운, 김필순(金弼順), 남용우(南龍祐)가 사직하고 다른 교원을 채용하는데, 이때 능인여자학원에 2,3,4학년에 재학중이던 여성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진행한다. 이들은 우봉운 김필순 남용우 세명의 선생님이 아니면 교수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동맹휴학을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봉운은 정들었던 학교를 떠난다. 침체되었던 불교청년운동의 활성화는 1928년부터 가시화되는데 불교여자청년회 역시 1929년 재건된다. 하지만 그 즈음 우봉운은 불교여자청년회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재건된 불교여자청년회에 우봉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봉운과 함께 하였던 김광호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김일엽이라는 유명한 여성인사가 불교계에 등장하는 시기도 그때부터이다. 불교여성운동의 출발이었던 조선불교여자청년회를 창립하고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우봉운은 그 때 여성운동단체였던 근우회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중심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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