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선우회 활동과 해방 공간 - 우봉운 여섯번째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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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를 다니며 新聞勸誘員 노릇을 하든 禹鳳雲女史는 日前에 그 社를 그만두고 安國洞 女子禪學院에 居處를 정하고 잇섯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女士의 爲僧設까지 流布되엇스나 그 眞否는 아직도 모르겟다. - 禹鳳雲 女士의 그 뒤, 『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9월 1935년 9월에 어느 잡지에 실린 우봉운의 근황이다. 여성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난 우봉운은 신문권수원(新聞勸誘員) 일을 하면서 안국동 여자선학원에 있었다. 심지어 스님이 되었다는 풍문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신문권수원은 신문 구독을 하다가 구독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신문을 계속 보기를 권하는 일이었다. 우봉운은 신문권수원을 호구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근우회 활동을 어느 시기에 정리한 우봉운은 1930년대 초 생계를 이어가면서 부인선우회라는 단체의 임원도 역임하면서 선학원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부인선우회 활동 위 잡지의 기사와 달리 우봉운의 거주처는 선학원이 아니라 가회동 78번지의 주택이었다. 지금의 지번으로 따지만 헌법재판소와 재동초등학교를 지난 가회동 자락이다. 이 곳에서 우봉운은 그림을 배우는 아들 둘과 함께 살면서 선학원을 다닌 것으로 보인다. 우봉운이 활동한 부인선우회는 어떤 곳인가? 부인선우회에 대해서는 아래 참고문헌에 있는 조승미의 박사학위 논문에 연구된 것이 있다. 이를 재인용하면서 부인선우회에 대해서 살펴본다.
3월 1일에는 ‘남녀선우회’가 조직되는데, 이때의 회원은 총합 70여명이었다. 남녀선우회는 남자선우회와 여자선우회를 통칭하는 이름인데, 남자선우회는 비구를 여자 선우회는 재가여성들을 말한다. 부인선우회의 창립총회에서는 정락전습소(正樂傳習所)의 축하음악, 한용운의 설법이 있었다. 한용운은 창립초기부터 부인선우회에서 자주 설법하기도 하였다. 1931년 선학원의 하안거 수행은 ‘10여인의 스님과 신도를 합하여 30여명이 참여하였다’ 하므로 여성수행자는 20명 정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선수행과 병행하여 기도수행이 진행되기도 하여, 탄옹화상의 慈悲懺法 釋辭와 동시에 일주일 미륵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동안거 결제 전에는 지장기도를, 1932년 2월에는 7일 관음기도를 하였다. ‘이 기도 중에는 매일 저녁 백용성 화상이 『달마사행론』을 강석했다’하는데 기도를 겸하면서 참선수행을 하는 방식은 백용성의 영향으로 보인다. 선학원의 승려들은 부인선우회를 매우 중시하였고 여성수행자들을 고무시켰던 것이다. 부인선우회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원이 증가하여, 1931년 12월 백용성 화상의 설법이 있었던 정기회에서는 70명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부인선우회는 “우리는 부처님의 정신을 체달하여 자선을 선포실행하며 부인들을 인도교양하고 견성성불 하기로 하자.”라는 강령 하에 참선수행 뿐 아니라 사회참여적인 사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1931년 11월 정기회에서 在滿동포구제사업을 하자는 간부 우봉운의 발의가 일치 가결되어 현금 7원여와 의복 80여 점을 수집하여 재만동포구제회에 送致하였다. 우봉운이 부인선우회에서도 간부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봉운은 3년 뒤 부인선우회의 간부소개란에서는 보이지 않아 그녀의 부인선우회 간부활동은 초기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와 같은 부인선우회의 사회참여적인 사업은 이후에 보이지 않는다. 이상이 부인선우회에 대해서 조승미의 글을 재인용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우봉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우봉운은 부인선우회 창립 초기에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재만동포를 위한 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3년 뒤 부인 선우회의 간부에는 우봉운의 이름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1935년 9월 『삼천리』잡지에서 밝힌 것처럼 그때까지 우봉운은 선학원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우봉운은 어떻게 선학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여기에 다시 그의 전 남편 기석호와의 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석호는 1921년 선학원이 창건될 당시 선우공제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35명의 수좌 중 1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1931년 다시 재건된 선학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공간에서 활동 아쉽게도 1935년 9월 이후 우봉운의 행적이 해방공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1939년 1월 동아일보에 여성운동을 결산하는 대담에 참여한 것 이외에 기록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우봉운은 가족사적으로 여러 일들이 일어난다. 우리가 다음 회 마지막 글에서 자세히 살필 예정이지만, 인연이 계속 이어졌던 기석호가 사망하였고 두 아들은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전란 시기에 두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한 활동만 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활동을 하였는지 고민해볼 사항이다.
우봉운이 해방공간에 이름이 드러난 것을 정리하면, 1945년 9월 1일 조선인민공화국 경성시 인민위원으로 선출된다. 1948년 1월 9일에는 민족자주연맹 상무위원회에서 부녀 대표로 임원으로 선출된다. 운암 김성숙도 함께 한 단체였다. 1948년 4월 15일에는 민주독립당 상무위원회에서 부녀 책임자로 임원으로 선출된다. 민주독립당은 홍명희가 이끌던 정당이다. 해방공간에서 우봉운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이라는 좌익 계열의 운동을 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는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여성부문으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북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의 일은 우리가 짐작하듯이 알려진 것이 없다. 우봉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그의 가족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다. 반복되게 나타나는 기석호와의 인연, 그리고 그의 두 아들 기웅과 기의벽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참고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