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의 포교사 3명
구치소를 집처럼 드나드는
세 명의 포교사
본광화 묘정현 보살님이 포교사 품수를 처음 받고 배치된 곳이 교도소였다. 본광화 보살님은 영등포 교도소, 묘정현 보살님은 의정부 교도소. 당시 교도소 출입문은 세 겹이었다. 입소 첫날, 교도소 문이 ‘쿵’하고 닫힐 때마다, 심장도 함께 뛰었다. 쿵~ 쿵~ 쿵, 그렇게 세 번. 포교사 첫 활동을 시작한 날, 두려움과 걱정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였다.
5~6년 전, 성동구치소 교화활동의 주 책임을 불광사가 맡게 되면서 이들은 재적사찰과 함께 할 수 있는 구치소로 활동 공간을 바꾸었다. 10여명의 포교사가 함께하는 데, 이 중에 불광사 신도는 해인관 보살님까지 합하여 3명이다. 해인관 보살님은 3년째 되는 초짜(?)이다.
세 명의 포교사가 하는 일은 매주 법회를 지원하 일과 불교교정인협의회가 잘 운영되도록 음으로 지원하는 일이다. 남자와 여자들이 별도로 법회를 하는 데, 주로 스님들이 법회를 진행하지만 포교사들이 진행하는 별도의 교리법회가 있다. 이 때는 포교사들이 부처님의 생애와 교리를 배우는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해야 한다.
팁 하나,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진지하다. 여자들은 형이 확정되면 대개 다른 곳으로 가지만, 남자들은 확정된 후에도 성동구치소에 남는 경우가 많단다.
포교사라는 자부심
포교사 활동은 쉽지만은 않다. 특히 교도소, 구치소를 담당하는 교정교화팀은 포교사 활동 중 3D로 꼽힌다. 군부대나 염불팀은 지원자도 많고 폼(?)도 난다. 교정교화팀은 지원자도 많지 않고, 1년의 의무기간이 끝나면 많이 그만둔다고. 교도소는 더 그렇다. 교도소에는 장기 수형자들이 많기에 수도승의 반열에 오른 분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거의 고양이 앞에 쥐가 된 심정이다.
세 명이 가장 바쁜 때는 부처님오신날 즈음하고 수계법회 때이다. 구치소에서 진행하는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는 재소자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날이다. 이 때 불교교정인협의회 분들 회의도 준비하고, 당일 행사도 준비해야 한다. 특히 선물을 준비해야한다. 예전에는 부족한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비의 선물 행사가 정착되어 당일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선물과 떡을 베풀 정도는 되었다고.
법회에 제법 많은 인원들이 나온다. 남자와 여자가 별도로 매주 법회를 보는 데 남자들은 6~70명, 여자들도 2~30명이 나온다. 처음 법회에 참석할 때는 선입견도 있었지만, 지금은 크게 게의치 않는다. 스님이 계시지 않고, 포교사가 직접 진행하는 교리법회 때 ‘죄, 악이라는 단어를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데, 그때는 좀 그렇지 않나?’ 라고 물어보았다. 대답이 걸작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받아들여요.
팁 둘, 남자 재소자법회에는 비구니 스님과 여자 포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데, 여자 재소자 법회에는 남자 포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다. 단, 비구 스님들은 들어갈 수 있다.
안타까움과 평등심
구치소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밖에서도 안타까움이 존재하지만 안에서도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가끔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담활동이 주로 스님들의 몫이지만 곁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밀려올 때, 인생을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구치소, 교도소하면 떠오르는 선입견이 있지만, 법회에 만나는 사람들은 사회의 일상생활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고. 세 명의 포교사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 활동을 하면서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평등심을 느끼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란다.
팁 셋, 구치소에서 종교활동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요일마다 각 종교가 돌아가면서 같은 장소에서 의식을 갖는다. 그러다 보니 가끔 실수가 있는 날이면 십자가를 후불탱화로 모셔놓고 불단을 장엄하는 경우도 있다. 종교간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