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과 개종 - 우봉운 세번째

buddhistory

by 북한산인 2012. 7. 6. 15:56

본문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07월 06일 (금) 14:59:26김남수

 지난 글에서 우봉운이 1917년 즈음에 연해주로 간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연해주로 간 시점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제1차 세계 대전 반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로 옮기었다가 다시 명동으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는 듯하다. 우봉운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던 때는 1919년 이후로 보아야 할 듯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9년 3.1운동은 간도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러시아 혁명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었으며,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이 무장투쟁으로 급속히 전환된다. 간도 연해주 일대는 한국 사회주의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독립운동의 무장투쟁이 가장 활발히 벌어진 지역이기도 하다.


  
▲ 연해주에서 진행된 무장독립운동
 우봉운 역시 젊은 시절을 함께하였던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우봉운이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유를 사회주의 이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봉운이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곧바로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추측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우봉운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 과정을 그려볼 예정이다.

 

  

간도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1910년대 후반, 특히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간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봉운이 간도에서 애국부인회 회장을 활동한 기록이 있다. 1919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발표한 곳이 바로 간도 애국부인회이다. 「선언서」 에 우봉운의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다.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우봉운이 참여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1910년대 북간도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 광복단과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조직된 철혈단이 통합되어 1918년경에 조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복단은 1911년 초 이동휘가 북간도 지역을 순방했을 때, 항일투쟁의 비밀 핵심 조직으로서의 조직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최계립의 회고에 따르면, 1919년 말 당시 철혈광복단원은 1천3백53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여자단원은 3백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주요한 여자 단원으로는 명동의 우봉운, 용정의 전신태, 와룡동의 김신희, 왕청의 김선희, 블라디보스토의 채계복, 온순명 등이었다고 한다. 철혈광복단 이름이 유명해진 사건이 있다. 이른바‘15만원 탈취사건’이다.

 1919년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은행의 자금을 탈취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27일 만에 주동인물 3명이 일제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자금 역시 다시 빼앗긴 사건이다. 사건에 참여한 우봉운은 채계복 이의순 등과 함께 피신하여 어느 때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긴다.


 연해주로 옮긴 삼일여학교 교사로 활동한다. 삼일여학교 역시 기독교 계통에서 적어도 1917년 이전에 설립한 학교이다. 삼일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은 각종 반일행사에 적극 참여했으며, 교사는 김덕영(1917년), 이의순(1919년), 연해주 애국부인회 대표 윤보민(1922년) 등이 있었다. 이동휘의 둘째 딸, 이의순은 여기서도 우봉운과 함께하고 있다.


 우봉운은 부인독립회 활동을 전개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인회 회원들은 노인동맹단, 청년회 등 다른 애국단체들과 독립운동비 모집에 진력하였다. 당시 부인독립회는 연해주에 활동하였던 사람들과 이의순, 채계복, 이혜근, 우봉운등 간도에서 이주해온 여성들이 함께 진행하였다. 앞서 이야기한 ‘15만원 탈취 사건’이 일어났던 것도 이 즈음이다.

 독립운동이 다시 활성화되고 더불어 부인독립회의 활동 역시 활발해졌다. 부인독립회는 항일무장투쟁에 대비하여 부상한 독립군들을 간호하기 위한 간호부 속성과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부인독립회의 간호부양성계획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진행되었는데, 1920년 봄 현재 50여명의 한인여성들이 단기속성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 1920년 3월 1일에 개최된 독립선언기념회는 당시 블라디보스톡의 한인들 전체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러시아혁명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개최된 만큼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과시한 행사이었다. 부인독립회의 한인여성들도 기념회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블라디보스톡에서 진행된 3.1운동 기념행사
 러시아혁명 이후 항일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연해주 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1920년 4월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신한촌 등 항일운동 기지에서 많은 한인들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 참변으로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반이 송두리채 파괴된다. 블라디보스톡의 주요한 한인단체인 대한국민의회, 한인사회당, 노인단, 애국부인회 등의 주요간부들은 흑룡주나 만주 또는 농촌지역으로 도피하여 재기를 도모한다.


 부인독립회의 주요간부들인 이의순, 채계복, 우봉운은 한인지도자들과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이만의 한인 부락인 다반촌으로 도피하여, 노인단 재무 한승우 (韓承宇)의 보호를 받는다. 4월참변이 지난 한참 후 이의순과 우봉순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하였으며, 삼일여학교의 교사로 복귀하였다.


   연해주를 떠나 국내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언젠가 우봉운은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다. 한 사람이 믿었던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울타리는 무의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해본다.


 우봉운이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곧바로 불교를 신앙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계기는 사회주의 이념이다. 우봉운이 있었던 연해주는 조선인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했던 기원의 땅이기도 하다. 우봉운이 큰 나무로 의지했던 이동휘는 1917년 출옥 후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였고, 1918년 4월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된다. 이동휘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즈음 이동휘가 기독교 선교와 병행하였던 독립운동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봉운이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 것도 이 즈음일 것이다.


생각건대 내가 년전에 海參威로부터 나와서 北間島에 온 즉 그 곳에 朴元熙 女史가 잇섯다. 그는 서울 청년회의 쟁쟁한 투사로 또 무산자동맹회원으로 足跡이 국내국외에 멀니 미치어 매우 꾸준한 활약을 보이고 잇든 때이다. 날더러 서울청년회의 입회를 권유하면서 조선의 운동사정을 소상히 이약이하여 주엇다. 그때 나는 사회주의 학설에 대하여 좀더 연구하고 십흔 생각을 하고 그가 속하여 잇는 단체에는 가입하지 안엇스나 그와는 훨신 갓가운 벗이 되엇다.
그 뒤에 나는 서울에 올나와서 北風會에 들엇다. 파벌을 따진다면 그와 나는 딴 派에 속하나 모든 운동을 위하는 데서는 一致하여 그는 나를 밋고 나는 그를 여간 밋은 것이 아니다. - 『삼천리』 제7호, 1930년 7월


 한참 전에 살펴보았던 김사국의 부인 박원희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원희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함께 활동하였던 인사들이 박원희에 대한 회고를 하는데 우봉운이 회고한 내용이다.

  
▲ 김사국의 부인 박원희
 이 글에서 우봉운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서 북간도로 나왔을 때, 박원희를 만났다고 회고한다. 박원희가 우봉운에게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우봉운은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주의 학설에 관심이 많았던 우봉운은 이를 매개로 박원희와 인연을 계속 맺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때가 언제 쯤 일까? 박원희가 우봉운에게 서울청년회 가입을 권유했다고 하니, 적어도 1921년 이후의 일이다. 국내에서 우봉운의 활동이 드러나는 시기는 1922~3년 경이다. 즉, 우봉운은 1921년 경에 연해주를 나와 간도를 거쳐 국내로 들어온 것이 된다.

 우봉운에게 있어 특이한 시기가 이 때이다.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우봉운은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청년 운동도 전개한다. 10대 초반부터 기독교를 신앙하기 시작하여 30즈음에 그 울타리를 벗어난 여성이 곧바로 불교를 믿게 된다. 너무 급작스럽지 않나?


 우봉운은 왜 다시 국내로 들어 왔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1922년 이후 우봉운이 연해주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있기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우봉운이 의지했던 이동휘는 1920년대초 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멀리는 상해까지 활동반경을 넓혀가고 있었다. 또 러시아 혁명 이후 오랫동안 진행된 내전이 종료되면서 연해주에서의 기독교 선교활동과 민족주의 이념이 위축된 것이 그 원인일수도 있다. 즉, 우봉운 활동의 토대가 되었던 기독교의 기반이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위축된 것이다.


 좀 적극적으로 추론하면, 우봉운이 사회주의 운동의 전파를 위해 국내로 들어왔을 수도 있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이동휘는 운동의 전파를 위해 국내 활동을 전개하는데, 우봉운 역시 그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다. 우봉운이 사회주의를 접한 것은 당시 사회주의 진영내에서도 아주 빠른 편에 속한다.


 이같은 이유는 우봉운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국내에 되돌아온 이유는 설명되지만 불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유는 되지 못한다. 기독교를 믿었던 신여성이, 그리고 일정 정도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신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남편의 출가와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남편 기태진은 출가 이후 기석호라는 승려가 되어 서울에 있었다. 혹시, 우봉운은 출가 이후 헤어진 남편을 만나러 서울, 즉 경성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모를 일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