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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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이른바 귀의(歸依)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1919년 3.1운동의 좌절 이후 사회에는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물결이 넘실거렸으며, 지식인들 일부에서는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와 김일엽이다.
우봉운에 대한 연구는 우봉운 자체 보다는 여성운동의 한 갈래에서 거명되곤 한다. 불교계에서는 김광식의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창립과 변천>이 유일한 듯하다. 우봉운의 불교 활동과 관련해서는 김광식의 글을 참조하였다. 기독교를 신봉한 신여성 우봉운을 말하는 데 거론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 그의 남편 기태진(奇泰鎭) 우리 여자 사회의 선진(先進)인 우봉운 여사는 자애롭고 감동하고 분투하여 동지를 규합시켜 불타의 진정신(眞精神)으로서 여성의 덕성을 함양(涵養)시키는 선지 계발을 위해 지난 大正 11년 4월 조선불교여자청년회라는 단체를 조직한 이래 4개 성상(星霜) 동안 회장 우봉운 여사의 열성과 노력은 일시도 그치지 않아.. 일제시대 발행된 《조선불교》1925년 4월에 실린 글이다. 즉,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과 활동은 우봉운의 역량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1922년이면 우봉운이 불교에 입문한 지 2년 내외의 시기이기도 하다. 불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봉운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다. 기독교를 믿었던 신여성 우봉운은 어떻게 불교여성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을까? 이제 그 과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1930년 발간된《삼천리》5호에 우봉운의 이력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우봉운은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고, 그 때 나이가 40이라 했으니, 1890년 전후로 출생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에 있는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한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인 엘러스(Annie Ellers)가 서울 정동(貞洞)에 창립한 기독교 계통의 여성교육기관이다. 엘러스는 구한말 선교사였던 벙커(D. A, Bunker)의 부인이었다. 1895년 연지동으로 교사(校舍)를 옮기고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라 칭하였다. 1903년 연동여자중학교라 개칭하였다가, 1909년 학부(學部)로부터 인가를 받아 사립정신여학교로 또 다시 개칭하였다. 우봉운이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학부로부터 인가받아 정신여학교로 개칭한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1909년 이후로 보아야 하나 확신하기는 어렵다. 우봉운은 졸업 후 대구의 계성여학교(啓星女學校)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한다. 계성여고 역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학교이다. 기태진(奇泰鎭)과의 만남 우봉운은 정신여학교 학생으로 있는 2년, 계성여학교 교사로 있는 3년을 합하여 4~5년 동안 기태진과 러브레터(love letter)를 주고 받다가 결혼한다. 우봉운은 기태진과 러브테러를 주고받는 과정을 《삼천리》제9호에 싣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우봉운은 정신여학교 시절에 기독교 사회의 누구누구라고 하는 분들과 회합하는 중에, 당시 안면도 없었던 기태진의 러브레터를 받게 된다. 기태진이 먼저 우봉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렇게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이 정신여학교 시절 2년, 계명여학교 교사 시절 3년에 이르게 된다. 이 기간에 우봉운과 기태진은 각각 수백장의 편지를 주고 받는다.
서로 간에 얼굴도 모르고 편지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 우봉운이 받은 편지에 기태진의 사진이 실려 보내져왔다. 모르는 남자의 연애편지와 사진을 받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의 과정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긴긴 편지 뒤에 결혼하엿다. 그러다가 그분은 합병이전 李甲, 安昌浩, 安重根의 仝生되든 安明根 등 38人이 한꺼번에 잡히든 엇든 중대 사건에 관계하고서 해외에 뛰어버렷다. 우봉운이 회고한 글이다. 우봉운이 러브레터를 주고받을 시기에 기태진은 함경도 성진에 있는 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글에서 언급하는 안명근과 관련된 사건은 1910년 말에서 1911년 초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안명근은 안중근의 사촌동생이다. 위의 회고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우봉운이 일부러 숨기고 싶은 사실이 있어서 일까, 혹은 착오일지 모르지만 사실과 다르게 기술된 내용이 있다. 안명근 사건으로 우봉운과 기태진이 헤어진 것이 이들의 마지막 만남은 아니다. 그들은 이후 간도에 있었던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함께 있었다. 기태진의 출가는 1914,5년 이후의 일로 봐야한다. 그전까지 우봉운은 기태진과 함께 부부로 있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우봉운은 남편 기태진을 통해 이동휘와 인연을 맺게 되고, 이후 간도 명동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까지 근 10년의 과정을 함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 남편 기태진은 금강산으로 출가한다. 다음 글에서 우리가 보게 될 내용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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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이념의 수용과 개종 - 우봉운 세번째 (0) | 2012.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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