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Plus> 2012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광덕 스님과 대불련의 첫 인연은 한참을 거슬러 1963년 9월 종단적 관심속에 창립된 대불련 초대 지도법사를 맡으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대불련 고문에는 성철 스님이 추대되었고, 지도교수로 서경수 교사와 박성배 교사가 임명되었습니다. 창립 후 대불련은 해마다 수련대회를 열어 구도행각을 펼쳤고 그때마다 스님은 수련대회에 참가해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1965년 9월 12일 봉은사 주지 소임을 시작한 광덕 스님은 소임을 맡은 당일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 학생들과 함께 대학생 수도원을 봉은사 경내에 설립합니다. 이후 보현행원품 암송, 3천배 등 시험을 거쳐 수도원생들을 선발했는데 당대 최고 선지식인 광덕 스님, 법정 스님, 박성배·서돈각·서경수·이기영 교수 등을 모시고 정진하려는 사람들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수도원에 들어온 학생들은 새벽예불, 보현행원품 독경, 참선, 초발심자경문 공부, 도량 청소를 시작으로 방과 후에는 저녁예불 시간(오후 7시)까지 절에 돌아와 공부 및 참선수행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어기면 108참회를 해야 했고, 3번 이상 어길 시 퇴사 조치를받을 만큼 엄격한 생활이었습니다.그 시절 봉은사 일대는 서울에서도 외진 곳에 속했던지라 강북에서 대학교를다니는 학생들의 경우 수업을 마치고 뚝섬에서 배를 타고 와야 했습니다. 광덕 스님역시 불교정화 시기 총무원 서무국장, 총무국장 등을 겸하면서 동국대(당시 총무원은 동국대에 있었다.)와 봉은사를 배로 왕래하셨습니다.
봉은사에는 수도원생 대학들뿐만 아니라 범어사 스님 30여 분도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딸린 식구가 많다 보니 살림살이가만만치 않았는데 때로는 끼니를 굶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채마밭에 심은 상추로 전을 붙여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광덕 스님 상좌로 출가하신 지정 스님의 말씀에서 그 시절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큰스님은 오로지 불교의 현대화와 생활화, 즉 포교활동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칠석불공이니 입춘불공이니 하는 신도단련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절집 살림이 어려워질 수밖에없었습니다. 대중스님들이 아침공양을 마치면 점심공양을 준비할 쌀이 없어 전전긍긍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1967년 가을 광덕 스님은 봉은사 주지 소임을 사임하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내 일생에 주지는 이것 한 번뿐이지 두 번 다시 주지 직책은 하지 않겠다.”라고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봉은사를 떠난 뒤에도 광덕 스님과 대불련의 인연은 계속되었습니다. 대불련 초창기 멤버들이 졸업 후 동문회격인 ‘학사불교회(1967)’를창립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해 법문을 하셨고, 1974년 불광 창립 즈음에도 법문하신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 본 기사는 반월 스님, 불교신문, 불교평론에서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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