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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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 24일(음력 12월 25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김좌진 장군이 정미소에서 일명 ‘박상실’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김좌진 살해 직후부터 살해자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일원이며 재중한인청년동맹원인 박상실로 지목되었고, 배후자로 김봉환이 거론되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김좌진의 살해자는 최동범, 공도진이라는 필명을 지닌 이복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하였던 이복림은 1929년 만주총국의 책임비서였던 김백파의 특수임무를 받고 한족총연합회의 본부에 잠입하고 김좌진이 경영하는 금성정미소에 위장 취업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복림은 곧바로 도주하여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초기에 살해자로 거론되던 박상실과 이복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데, 박상실을 이복림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면 문제는 해소된다. 그럴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의 소재이기도 한 김좌진 살해의 배후자로 지목된 김봉환으로 돌아가 보자. 장례 직후부터 김봉환은 암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고, 살해 후 숨어있던 김봉환은 검거되어 곧 바로 사살된다. 김봉환이 김좌진 살해의 배후자였다면, 이 시기 김봉환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김봉환이 1927년 북경에서 만주로 이전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류 소설가로 유명한 강경애(姜敬愛 1906.4.20~ 1943.4.26.)이다. 독립운동가로 김좌진을 보필하였던 이강훈의 증언으로부터 등장한다. 김좌진을 없애기로 고려공산당에서 정합니다. 김일성(金一星)을 내세웠단 말이지. 지금 북한의 김일성이가 아니고, 본명이 김봉환인 김일성인데 정화암씨가 이 김일성이를 잘 알지요. ···(중략) ··· 강경애라고 하는 여자가 있는데 소설가이지요. 이 여자가 김봉환의 애인입니다. 그런데 강경애도 공산당이고 김봉환도 공산당입니다. 그러한 사이인데, 김봉환이 하얼빈에 나갔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렸어요. ···(중략) ··· 이놈이 붙잡혀 온 김봉환을 모략정책의 도구로 쓸 계획을 짭니다. 김봉환을 왜경의 스파이로 쓰자는 뱃심인 것입니다. 이때 김경애(金敬愛)가 찾아왔어요. 김봉환의 암살 동기 이강훈의 이 같은 증언에서 김좌진 살해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강훈은 김봉환이 일제에 잡힌 후, 풀리는 대가로 김좌진을 죽이게 되었고 이를 강경애가 일제와 협약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강훈은 위의 증언에서 김봉환의 애인을 처음에는 강경애라고도 했다가, 나중에는 김경애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자연스레 문제가 제기된다. 김봉환이 김좌진 살해를 도모한 것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계략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일제에 붙잡힌 김봉환이 일제의 사주를 받아 진행한 것인가? 또 하나는 ‘김봉환의 애인은 강경애인가 김경애인가, 강경애라면 여류 소설가 강경애인가?’라는 문제이다. 정화암은 사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갖는다. 정화암의 회고를 정리하면, “그 때 공산주의자와 우익 독립운동가들 사이가 아주 나빠 똑같이 항일한다고 하면서도 만주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같은 영안현 안에서도 어느 지역은 공산주의자들의 지역이고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극인 판인데, 공산당은 해림을 근거로 한 김좌진의 한종총련이 공산당의 활동과 사상전파에 많은 지장을 주는데다가 아예 기반마저 굳혀가자 우두머리인 김좌진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실행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봉환의 애인이 여류 소설가 강경애인가라는 문제도 제기된 적이 있다. <참고자료>에 있는 리광인이 지적한 대로 김봉환의 애인이 강경애가 아니라 김경애라는 주장이다. 리광인은 글에서 김봉환의 애인을 김경애로 보고 있다. 김성숙 김봉환이 북경에서 활동할 때, 상해 북경과 천진 서울 등을 오가며 활동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조선 여성 김경애를 김봉환의 애인으로 보고 있다. 김경애는 김성숙 김봉환이 발간한 『황야』, 『혁명』 잡지에 필명으로 기고하는 등 김봉환과 북경 시절부터 알던 사이로 추정한다. 이 주장은 설사 김봉환과 김경애가 북경 등지에서 서로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애인 관계였다는 사실은 입증하지 못한다. 김봉환과 강경애가 애인 관계였다는 사실은 이강훈의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고, 김경애라는 이름의 등장도 이강훈이 강경애와 혼동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즉 김봉환을 놓고 볼 때, 김경애는 이강훈이 이름을 혼동하지 않았더라면 등장하지 않았을 인물인 것이다.
즉, 강경애는 김봉환의 애인이었으며 만주에서 2년 내외를 함께한 것이다.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머슴 출신의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네 살 적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병약한 어머니는 장연으로 후살이를 들어가게 된다. 열 살이 지나서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장연소학교에 들어갔고 이어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에 독서회와 동맹휴학 주동으로 퇴학을 당한다. 강경애는 1924년 무렵에 장연 태생의 동경유학생이던 양주동을 만나 서울로 올라와서 동거하며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일 년여를 수학했다. ‘금성’지에 강가마(姜珂瑪)라는 필명으로 ‘책 한권’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양주동과 헤어져 언니가 경영하는 장연의 서선여관에서 기거한다. 이듬해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했고 20년대 후반까지 그녀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습작과 독서를 하는 한편 ‘흥풍야학교’를 개설하여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제 김봉환에 대한 글을 정리하도록 하자. 정화암 이강훈의 회고와 최학송의 글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김봉환은 1926년 혹은 1927년, 정화암의 회고대로 유치원 여교사 즉 강경애와 결혼하기 위해서이든 혹은 공산주의 활동을 위해서든 만주로 간다. 만주로 향하여 혁명투사들의 내왕이 빈번한 중동선 해림참(中東線 海林站) 역에 정착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의 북만구역국의 조직부장 김은한과 함께 아성지역에 파견되어 1927년 3월부터 두 달 동안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김봉환 활동과 관련되어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주로 이강훈의 회고에 근거하여, 김봉환이 이 시기에 강경애와 신민부(新民府)의 기관지인 신민보(新民報)에 종종 기고(寄稿)하여 부(府)의 사업을 옆에서 내조하였고, 이들의 투고가 적색(赤色)의 경향을 띠었다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강훈의 증언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리광인은 다른 글에서 이상경 교수의 말을 빌러 ‘신민보(新民報)의 주요 필자는 허성묵, 박두희, 최창익이며 강경애는커녕 김봉환의 이름은 없다’라고 한다. 김봉환이 강경애와 신민보 사업을 하였고, 이를 전후로 일제에 회유되었다는 이강훈의 회고가 중요한 부분에서 또 한 번 의심되고 있다. 김봉환은 1928년 경 박상실 경 김좌진 암살 계획을 세웠으며, 김좌진이 경영하던 정미소의 머슴으로 잠입한 박상실은 1931년 1월 그 계획을 실행한다. 사건 후 박상실은 도망갔으며, 해림의 어느 예배당에 숨어 있던 김봉환은 잡히어 사살된다. 김봉환이 사살된 지 1년 후 만주에 도착한 정화암은 해림에서 산시로 가는 산모퉁이의 바위 옆에서 뒹굴고 있는 김봉환의 해골과 뼈를 수습한다. 시체를 덮었던 거적은 살과 함께 다 썩어서 흔적만 남고, 앙상히 남은 뼈만 나뒹굴고 있었다. 정화암은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이역만리 밖에까지 나와서 동족상쟁을 하느냐!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한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흉하고 한편으로는 죽어 마땅했지만 불쌍한 김봉환의 해골을 땅에 묻어 주었다. 이때가 김봉환이 나이 서른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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